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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항상 겸허하라, 다산초당

by 믹스 2024. 1. 26.

#2405

기본적으로 항상 생각하곤 한다. 내가 하는 지금 이 일이 정답일까. 깨달음을 얻은 분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평소 내가 일을 하는 데 있어 항상 가지고 있던 생각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지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실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성공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제는 식상하기까지 한 표현이다. 하지만, 행복의 기준이 사람에 따라 모두 제각각인 것을 생각하면 이 말이 정론이고 절대명제에 가깝기 때문에 계속 인용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된다. 개발도상국의 사람들이 선진국에 비해 행복지수가 높다는 조사결과들은 이런 내용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닐까.

죽은 사람의 마음만이 계속해서 고요할 수 있다.

죽은 자만이 사고를 멈추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의 머릿속에서 혼자 되뇌는 생각의 실타래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얽히고설켜있다. 이런 고뇌의 끝은 생각을 멈추는 것. 잠시나마 이런 생각을 내려놓고 호흡에 집중하는 명상의 과정은 설득력이 있고 받아들이기 쉬운 느낌을 받았다. 특히 어렵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럽기에 의식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호흡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과정을 통해 명상이 가능함을 알려주고 있다. 다른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그 생각을 내려놓고 들이마시고 내뱉는 본인의 호흡에만 집중하는 과정이 명상이라는 것이 받아들이기 수월했다.

인생무상, 이 또한 지나가리라

힘든 시간도 즐거운 시간도 결국은 현재를 지나가는 작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함축적으로 녹아있는 이 말 역시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는 흔한 이야기다. 저자의 평범하지 않은 삶을 통한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기에 그 무게가 남다른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힘든 시간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지만, 결국은 긴 인생 속에서 한때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고 보듬어주고 용서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때 나름의 성찰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그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양한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며 반박하거나 아는 내용을 바로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수행을 하는 수행자가 아니기에 그 유혹은 강하고 거부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특히 내가 하는 일에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과 판단이 들게 될 경우 그 유혹은 너무 강하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경험해 본 적이 있는데 속으로 정리하면서 내가 화자와 다른 방향을 보면 반론을 하려는 것은 아닌지. 상대의 현 상태가 어떤지 생각해 보고 고려하며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전제하에 상대와의 대화를 이어나가려 노력하곤 한다. 어쩌면 이 덕분에 큰 문제없이 사회생활을 있어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책에서 다루는 자기 성찰과는 약간 그 궤를 달리하는 것 같지만,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원하는 것을 항상 가질 수는 없지만, 필요한 것은 항상 가질 수 있다.

누구나 원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손에 쥐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하지만, 필요로 한다면 가질 수 있게 된다. 필요한 것을 가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 지 생각하게 되고 실천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에 큰 차이는 없을지 모른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강하고 진솔되게 원하는지에 따라 그 형태가 바뀌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 바라고 있는 것은 원하는 것인가 필요한 것인가. 그 기준을 명확하게 가질 필요가 있겠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모든 사람과 반드시 이별할 것이다.
이것만이 확실하며 그 외의 것은 다 추측이고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 뒤에 사라질 모든 것을 내려놓거나 적어도 살짝만 쥐고 살아라.
죽음은 걱정도, 의심도, 어떤 예측도 불허하는 모험이다.

항상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 수는 없다. 현실의 무게를 이겨내는 것이 그리 쉬운 건 아니니까. 승려의 자기 수행을 위한 고행은 그 길을 선택한 당사자로서 당연한 것일지라도 일반인들에게 현실에서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초월자로 살라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닐까. 단지 어떤 일을 실행하기 전에 그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너무 앞질러 갈 필요도 없다. 아무리 움켜쥐고 싶어도 결국은 타고난 두 손을 넘어서는 물건을 쥐고 있을 수는 없다. 놓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미련도, 욕심도, 미움도 적정선을 지키며 살짝만 쥐고 있어야 한다. 단지 주변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넘쳐도 될 것 같다.

생각하는 행동, 상상력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단지 눈앞의 것에 연연하며 아둥바둥거려도 결국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나와 내 주변인들과의 행복했던 기억만을 가져갈 수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기억도 마지막 순간에 가져가기보다는 그 순간 떠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다.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그리고 공평한 만큼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것만이 진실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간이라는 것이 미약하나마 가능성이 있으면 포기하지 못하고 매달리는 경향이 있는데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통해 눈앞의 세상이 한꺼풀 벗겨진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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